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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구미의병아리앙제 '국의병장 허위' 20230901"피고, 허위! 죄인이 감히, 대일본제국에게 저지른 불경한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 1896년 의병을 모아 대일본제국을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연합의병창의군’이라는 불순단체를 결성해 대일본제국에 총과 칼을 겨누어 많은 죄를 저지른 대역죄인이다 피고,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입니까?"(재판관)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죽더라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왕산 허위) 대일항쟁기 구미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의병장의 뜨거운 의병운동이 소리극으로 부활된다. 그가 돌아와서 의병들과 함께 '의병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경성으로 진격한다. 진격!!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회장 임규익) 주최주관으로 제15회 구미의병아리랑제에서 배경숙 예술감독의 연출로 소리극 ‘구국의병장 허위’가 개최된다. 1부에서는 '저항의 노래', 2부에서는 '승리의 노래'로 구성되어 의병정신이 발현되는 과정과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전래민요집에서 채록된 영남의 민요와 아리랑이 극의 단막과 어울어져 허위장군의 붉은 애국심을 펼친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는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사형수로 1908년 10월 21일 정오, 경성감옥의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왕산의 나이 54세였다. 교수대에서 일본 헌병사령관도 그의 당당한 기개에 고개를 숙였다고 알려졌다. 소리극에서 허위 장군의 13년 의병투쟁을 구미의병아리랑에 담아서 허위장군의 의병정신을 기린다. 왕산의병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어얼싸 아라리야(후렴) 1. 여봐라 우리네 대장군나셨다 13도 창의대진 군사장이시다 2. 노래하라 외쳐라 우리네 의병장 기린다 우리는 왕산허위대장군 3. 나시니 구미땅 임은동이요 서시니 경술년 30조 호령이다 4. 오얏꽃 날리는 3월이 오면 밤새도록 노래하라 그립다하여라 5. 역사는 기린다 왕산허위장군 산하가 외친다 너는 아냐고 6. 13도 넘어서 이역 만주 땅까지 창의하여 거병하니 세상이 들썩 극중 등장인물은 허위, 허훈, 허경, 이기찬, 아카시(일본 헌병사령관) 5인과 보존회 30여명이 민중들로 나와서 구미의병아리랑, 구미아리랑, 영남민요 10여 곡을 소리극으로 올린다. 올해왕산 허위 선생 115주년 추모제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광복절에는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가 서울 왕산로, 남인사마당, 광화문,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아리랑버스킹' 공연에서 왕산허위장군을 기리는 구미의병아리랑을 널리 알렸다. 임규익 회장은 내년에도 왕산로와 광화문광장에서 구미의병아리랑을 알리겠다고 전했다. 특히 사할린 동포 인무학 교수(모스크바 대학)에 의하면 "왕산허위 손자 허진 선생은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극작가로 일하면서 늘 허위장군의 의병활동을 널리 알렸다. 고려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의병장이다. 당시 많은 의병들이 서울 진격작전을 실패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라고 전한다. 당시 유관순의사, 안중근의사, 윤봉길 의사 등은 널리 알려져있지만 허위 의병장은 구미에서만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와 자손들이 국외로 이주하였다. 허위장군 처럼 묻혀졌던 의병운동의 자취를 발굴하고 복원시키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본다. 구미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얼씨구 노다가세 노다가(후렴) 금오산 참꽃은 다시 또 피련마는/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언제나 오려나 왕산의 충절과 용맹의 기상은/내 고향 구미의 자랑이라 2005년 배경숙의 '구미아리랑' 발표 후 창립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는 2009년부터 경상북도과 구미시 후원으로 매년 구미아리랑제 개최, 2018년 이후는 허위의병장을 기리는 구미미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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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구미의병아리랑 #임규익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2005년 배경숙의 '구미아리랑' 발표 후 창립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이사장:임규익)은 2009년부터 경상북도과 구미시 후원으로 매년 구미아리랑제 개최, 2018년 이후는 허위의병장을 기리는 구미미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구미의병아리랑 작사·작창 배경숙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야 아리랑 어얼싸 아라리요 1. 여봐라 우리네 대장군 나셨다 13도 창의대진 군사장이시다 2. 노래하라 외쳐라 우리네 의병장 기린다 우리는 왕산허위 대장군 3. 나시니 구미땅 임은동이요 서시니 경술년 30조호령이다 4. 오얏꽃 날리는 3월이 오면 밤새도록 노래하라 그립다 하여라 5. 역사는 기린다 왕산허위 장군 산하가 외친다 너는 아냐고 6. 13도 넘어서 이역 만주땅까지 창의하여 거병하니 세상이 들썩 7. 위로도 창의거병 비범한 진격 아래도 3천두락 만주땅 투신이라 8. 그 이름 청사에 찬란하시니 아느냐 의병장 허위장군이시다 9. 그날의 함성이 금오산을 감돌고 왕산의 나라사랑 그 뿌리가 이 곳일세 10. 금오산 감돌아 낙동강은 흐르고 채미정 맑은 기상 충효의 고장일세 11. 세월은 유수같고 인생사 허망해도 천생산 의연함은 우리님 모습일세 12. 낙동강 비단 물결 우뚝 솟은 금오 기상 풍요와 화락태평 아리랑 좋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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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구미아리랑제 #왕산허위 소리극구미의병아리랑 사·작창 배경숙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야 아리랑 어얼싸 아라리요 1. 여봐라 우리네 대장군 나셨다 13도 창의대진 군사장이시다 2. 노래하라 외쳐라 우리네 의병장 기린다 우리는 왕산허위 대장군 3. 나시니 구미땅 임은동이요 서시니 경술년 30조호령이다 4. 오얏꽃 날리는 3월이 오면 밤새도록 노래하라 그립다 하여라 5. 역사는 기린다 왕산허위 장군 산하가 외친다 너는 아냐고 6. 13도 넘어서 이역 만주땅까지 창의하여 거병하니 세상이 들썩 7. 위로도 창의거병 비범한 진격 아래도 3천두락 만주땅 투신이라 8. 그 이름 청사에 찬란하시니 아느냐 의병장 허위장군이시다 9. 그날의 함성이 금오산을 감돌고 왕산의 나라사랑 그 뿌리가 이 곳일세 10. 금오산 감돌아 낙동강은 흐르고 채미정 맑은 기상 충효의 고장일세 11. 세월은 유수같고 인생사 허망해도 천생산 의연함은 우리님 모습일세 12. 낙동강 비단 물결 우뚝 솟은 금오 기상 풍요와 화락태평 아리랑 좋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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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 소리극 #구미의병아리랑 #제12회구미아리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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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제11회구미아리랑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임규익) #영남민요연구회 구미지회 (2019.04.08)▲ 임은동 만세운동 재현 행사 팸플릿 ▲ 소리극 공연 뒤 참가자들이 펼침막을 들고 막 왕산초등학교를 나서고 있다. ▲ 영남민요연구회의 소리극이 끝난 후 배우와 단원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하고 있다. 지난 4월 8일, 구미시 임은동 소재 왕산초등학교 강당과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일원에서 소리극 ‘왕산 허위 선생’과 100년 전의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열렸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한 달여 후인 4월 8일에 구미 임은동 동산에서 벌어진 야간 만세운동을 꼭 100년 만에 재현한 것이다. 이날 왕산초등학교 강당에서 베풀어진 영남민요연구회 구미지회의 소리극 ‘왕산 허위 선생’은 왕산의 주요 행적을 연극으로 재현하면서 사이에 토속민요를 연창하는 방식의 공연이었다. 이 행사는 영남민요연구회의 제11회 ‘구미아리랑제’를 겸한 행사였다. 왕산초등학교 강당에 들어설 때만 해도, 관객이 얼마나 올지 등에 대해서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는데 행사 시작 전에 금방 강당이 차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참여가 많았고, 지역 주민들도 적지 않게 참석했다. 한 시간 남짓 공연한 소리극도 수준 이상이었다. 왕산의 행적을 재현한 이들은 연극배우들, 그리고 사이 사이에 영남민요연구회 회원들의 토속민요가 연창 되었는데, 이질적이지 않을까 염려했던 연극과 민요의 조화는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 왕산 허위 선생 역을 맡은 배우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 행사에 참여한 왕산 허위 선생의 유족, 허벽(오른쪽), 허창수 선생. ▲ 영남민요연구회 회원들의 공연 모습. 연극 사이사이에 토속민요를 불러주었다. 공연이 끝나자 민요연구회 풍물의 선도로 "다시 그날의 함성으로” 펼침막을 앞세우고 참가자들은 500m 거리의 왕산허위선생기념관으로 태극기와 엘이디 등을 흔들며 행진했다. 왕산기념관 앞마당에 마련된 연단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베푸는 4·8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이어졌다. 4·8 임은동 만세운동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임은동의 강용준(姜龍浚)·유시동(劉時東)이 의거를 계획한 후, 1919년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 주민을 규합하여 임은동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개한 만세운동이다. 이 소식을 듣고 4월 9일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이미 종적을 감추었기에 한 사람도 붙잡히지 않았다. 일본 군인과 경찰은 4월 15일, 다시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붙잡아 갔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련 재판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당연히 이들 가운데 아무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구미 지역에서 3·1운동 공적으로 서훈을 받은 이가 33분인데 이들은 모두 진평동과 해평면 출신이다. (구미 지역 독립유공자 현황 참조) ▲ 왕산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왕산기념관으로 이동하고 있는 참가자들. ▲ 왕산기념관 앞마당에서 베풀어진 4.8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참가자들. ▲ 구미 지역의 어린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돌아가면 낭독하고 있다. ▲ 마지막 만세 삼창으로 행사는 내년 2020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행사는 어린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돌아가며 낭독하고,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독립군가를 부르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행사는 구미 지역 독립유공자 57분의 이름을 사회자가 선창하고 참가자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는 행사에서 절정에 달했다. 행사는 만세 삼창을 끝으로 밤 9시를 넘겨서 끝났다. 행사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당초 이 행사는 구미지회(지회장 전병택)가 기획했으나 구미시와의 협의가 순조롭지 못해서 결국 구미시는 낮에, 민문연 행사는 밤에 치러진 것이었다. 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들의 후원과 성금으로 이루어진 행사였기에 오히려 뜻깊었던 행사였다. 첫 행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다지면서 치러질 2020년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다. 2019. 4. 10. 낮달 출처: https://qq9447.tistory.com/242 [이 풍진 세상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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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맞아 안중근의사기념관 찾아 참배....2022아리랑학교.6월 6일 현충일을 맞아하여 2022아리랑학교 참가자들은 의병아리랑을 주제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 참배를 했다.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은 1주일 동안 '아무르아리랑' 부르기 수업을 하였다.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대림사에서 매년 개최되는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불렀던 아무르아리랑(안중근의병아리랑)이다. 이 아무르아리랑은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이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의병아리랑을 헌사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만든 창작아리랑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아리랑연합회에 위촉한 '안의사 의병아리랑'이다. 당시 관장은 아리랑 가사에 반드시 '아무르'(흑룡강)을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국내 일제의 억압과 간섭을 피해 바다를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갈때는 아무르강을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발해의 옛땅 아무르강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이 강은 러시아에서는 ‘사랑의 신’ 이라는 아무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거대한 황토빛을 의미하는 ‘검은 룡’ 이라는 뜻의 흑룡강(黑龍江)으로 불린다. '아무르 아리랑'의 아무르는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중국 둥베이 국경 등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 강을 가리킨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아무르 강을 건너 크리스키노 언덕에서 동지들과 나라를 빼았은 도적놈(일제)를 척결하자는 단지동맹을 맺었다. 결국 안의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다. 이 아무르아리랑은 일본과 러시아에서도 불렸다. 2013년 안의사추모제가 개최되는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대강당에서 기연옥 회장이 초연으로 불렀다. 이후 이 '아무르 아리랑' 가사는 월간 '영웅'이 창간 기념으로 진행한 '안중근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월간 '영웅'을 발행하는 도서출판 '꼬레아 우라'는 아무르강 4000㎞의 유장함과 안 의사의 깊은 한을 민족어 '아리랑'에 반영한 '아무르 아리랑'을 높게 평가했다. 월간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의지와 사상을 되살려 통일 대한민국과 세계 평화의 길잡이로 삼겠다'는 취지로 창간됐다. 이후 서울아리랑보존회 유명옥 회장이 윤은화 작곡가를 위촉하여 편곡을 하고, 2015년 10월 27일 안중근의사 손자 토니안 선생에게 악보를 헌정했다. 그후 매년 개최되는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추모제위원회에서 요청이 왔다. 일본 대림사에서 '아무르아리랑'을 불러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2015년 공주아리랑보존회 남은혜 회장을 위촉했고, 2019년에는 이혜솔 회장을 위촉해서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다. 추모제 행사 무대에서 아무르아리랑이 울려퍼지자 참가한 일본인들과 재일한국인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리게 만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 옆에 선 한국에서 간 참가자들도 다수 눈물을 흘렸다. 아무르아리랑 작사를 한 필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행사가 끝나는 내내 두 눈을 감았다. 당시 필자는 가사를 짓고 나서 2014년 하얼빈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을 3번이나 다녀왔다. 소리극을 만드려고 시나리오와 가사를 구상하고 있다. 우리가 안중근의사에게 헌사한 '아무르아리랑' 사설은 다음과 같다. 윤은화 작곡가에 위촉한 선율은 1910년대 불렀던 '구아리랑'이지만, 러시아 아리랑학교 수업에서 불렀던 선율은 본조아리랑이다. 동포들이 누구나 쉽게 따라서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제5절은 입에 붙게 개사를 했다. 제4절은 흑룡강을 강조하기 위해 2행을 반복으로 불렀다. 이날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안중근의사 동상앞에게 헌사한 아무르아리랑은 본조아리랑 선율이다. 사설은 다음과 같다. 아무르아리랑 원수하고 같은 하늘아래 살수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쓰러지니 동양평화 대역사 시작되네 서릿발 칼날같은 저 용맹 아무르 흑룡강에 흐르고 흘러 아무르 흑룡강에 흐르고 흘러 동해바다 건너서 일어나네 동해바다 아리아리 아라리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무르 아리랑 아라리야 (후렴) 이날 이회장은 "3년전 일본 대림사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는 어렵게 불렀다. 이제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의병의 역사, 하얼빈 의거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나니, 가사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안의사의 의병정신을 불어넣어 부르려고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김화숙 부회장도 "우리 손자들과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다시 한번 더 와서 공부를 하고 '아무르아리랑'을 가르쳐 주고 싶다."라고 전했다. 2022아리랑학교 6번째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지역의 '의병아리랑'을 발굴하고 선조들이 지켜낸 의병정신을 해외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아리랑학교 참가한 회원들과 안중근의사 순국과 의병아리랑에 대한 토론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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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민요연구회 연혁영남민요연구회 연혁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회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회원 2019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단체 2019 경복궁 '아리랑고' 참가단체 2019 전국아리랑워크샾 참가단체(주관:한국문화재재단/한겨레아리랑연합회) 2003. 창립 2005. 제1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봉산문화회관 대공연장 ) <구미아리랑> 배경숙 작사·작창 창작발표 (봉산문화회관) 2006.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제1집 음반 발표 (두리음반) 제2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영남의 아리랑” (봉산문화회관 대공연장) <아리랑 종합 전승실태 조사보고서(2006년, 문화재청)>에 의거 "영남아리랑” 전 바탕 최초 발표 (봉산문화회관) 백남진(도 무형문화재 제 27호 보유자)외 특별출연 (구미전통아리랑) <봉화아리랑>은 당시 자료가 없어 배경숙 창작발표 영남민요연구회 경산지회(현 경산아리랑연구보존회) 설립 2007. 제3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구미문화예술회관) 백남진(도 무형문화재 제 27호 보유자)외 특별출연 (구미전통아리랑) <경산아리랑> 배경숙 작사·작창 창작발표 (영남대학교 인문대학 강당) 영남민요연구회 구미지회 (현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설립 대구시 전문예술단체 인증 2008. <삼일절 89주년 기념 발표회> "아리랑 그날의 함성” (주최,주관 영남민요연구회, 국채보상공원 종각 앞) 제4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제1회 <문경아리랑제> 공동주관 발표 (문경시민문화회관) 2009. 제5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아! 그리운 팔공산이여" (동구체육문화회관대공연장 ) <팔공산아리랑> 김기현작사· 배경숙작곡 작창발표 (동구체육문화회관) 제2회 <문경아리랑제> 공동주관 발표 (문경시민문화회관) 제1회 <구미아리랑제> <봉화아리랑> 봉화군 발표 음원 찾아 재현 함 (구미문화예술회관) 2010. 제6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그리운 팔공산인, 팔공산 노래여” (봉산문화문화회관 대공연장) 백남진(도 무형문화재 제 27호 보유자)외 특별출연 (구미전통아리랑) <영남아리랑축제> (주최 (재)전통공연예술진흥공단, 주관 영남민요연구회) (봉산문화문화회관 대공연장) 제3회 <문경아리랑제> 공동주관 발표 (문경시민문화회관) 제2회 <구미아리랑제> 2011. 제7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이재욱 아리랑을 만나다” (두류공원야외음악당) 제4회 <문경아리랑제> 공동주관 발표(문경새재 야외공연장) 제3회 <구미아리랑제> 2012. 제8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이재욱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다” (코오롱야외음악당)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아리랑 향유 전승단체들 의 아리랑 군(群) 안에 <팔공산아리랑>포함 세계유네스코 무형문화재 ‵아리랑‵ 등재시, 문화재청의 유네스코 제출서류인 ‵전승동의서‘에 서명 "영남의 흥” (송파구청 주최, 영남민요연구회 공동주관, 서울놀이마당)) 제4회 <구미아리랑제> 2013. 제9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아리랑 신명을 품다” (울릉한마음회관) 찾아가는 문화마당 (불로시장, 진명복지회관) 제5회 <구미아리랑제> 2014. 제10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아리랑 축제” (코오롱야외음악당) 대구국악제 축하무대 (코오롱야외음악당) 제6회 <구미아리랑제> 2015. 제11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영남아리랑 축제” (코오롱 야외음악당) 아리랑 노랫말의 영구보존을 위하여 문경시의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사업, <아리랑대장경>에 창작 <팔공산아리랑> 13수포함(문경옛길박물관) 구미발갱이들소리 정기공연 축하무대(지산샛강 특설무대) 제1회 <경산아리랑제> "일연의 향가 아리랑으로 꽃피우다” (경산시민회관대강당) <경산압량아리랑> 발표 (김기현작사, 이정호편곡) 제7회 <구미아리랑제> 2016. "영남아리랑 축제” (대구봉산문화회관 가온홀, 주관 영남민요연구회, 주최(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제12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이재욱과 함께 영남의 아리랑을 즐기다” (코오롱야외음악당)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제 2집 음반 발표 청송사과축제 (청송읍 송생리 테마공원) <청송아리랑> 배경숙 작사 작창 음반제작 (청송군 기증) 성주생명문화축제 (성주읍 성밖숲) 제2회 <경산아리랑제> 제8회 <구미아리랑제> 2017 제 13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영남아리랑” (동성로 야외 공연장) 창작국악극 "혼의 노랫길” (꿈꾸는씨어터㈜ 공동제작, 2017 창작국악극페스티벌 선정작, 남산국악당) 한중일 전통문화 페스티발(코오롱 야외음악당) 영남소리제전 가왕전(경상감영) 제3회 <경산아리랑제> (경산자인계정숲) 제1회 <경산아리랑 창착경연대회> (경산자인계정숲) 제9회 <구미아리랑제> 2018 제14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그리운 팔공산 노래여” (수성못 상화동산) 영남소리제전 (경상감영) 대구예술제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영남소리제전 (경상감영) 대구예술제 (대명동캠퍼스) 제4회 <경산아리랑제> (경산자인계정숲) 제2회 <경산아리랑 창착경연대회> (경산자인계정숲) 제10회 <구미아리랑제> (금오산분수광장) 2019년 제 15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15주년 기념 제3집 음반발매 기념” 공연 (대덕문화전당) 광주 대구 달빛동맹문화교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영호남 명창 명인초정 기획공연 (코오롱야외음악당) 서울아리랑페스티발 (광화문광장) 아리랑과 서도소리의 향기 (달성문화재단) 상주국악제 (상주문화회관) 제 11회 <구미아리랑제> (왕산초등학교) <구미의병아리랑>발표 (배경숙작사, 작창) 제 5회 <경산아리랑제> (경산자인계정숲) 제 3회 <경산아리랑 창착경연대회>(경산자인계정숲) 2020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영남민요연구회) 제16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영남의 소릿길” (신숭겸유적지) 달성아리랑제 (사문진나루터) 역사정의실천 시민운동가상 수상 (광복회장) 제 6회 <경산아리랑제> (경산 풀볼 경기장 특설무대) 제 4회 <경산아리랑 창착경연대회>(영상 심사) 제12회 <구미아리랑제> (구미문화예술회관) 2021년 제17회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소리극) 팔공산인 이재욱, 영남민요 향기로 피오르다" (꿈꾸는씨어터) 대구국악협회 언택트공연 (대구문화예술회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기념일 축하행사 (대구문화예술회관) 제 7회 <경산아리랑제> (경산문화회관) 제 5회 <경산아리랑 창착경연대회> (경산문화회관) 제13회 <구미아리랑제> (구미왕산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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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아리랑' 어떤 장단일까'김산의 아리랑' 어떤 장단일까 매일신문 배포 2013-08-12 07:52:34 | 수정 2013-08-12 07:52:34 15일 수성아트피아 제11회 대구아리랑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김산의 아리랑 소리극'이 15일 오후 7시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공연된다. 1930년대 독립운동가이자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던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이번 소리극은 1937년 중국공산당에 투신한 김산이 미국의 신문기자 '님 웨일즈'를 만나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각 지역의 아리랑을 한자리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김연갑'기미양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아리랑 해설을 들려주며, 이호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조교가 경기아리랑을, 강송대 전남무형문화재 제34호 보유자가 진도아리랑, 김길자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보유자가 정선아리랑, 이춘희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가 경기본조아리랑을 부른다. 또 바리톤 이인철과 이깐딴띠 중창단이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 아리랑을 들려주며,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원 80명이 함께 대구아리랑과 영천아리랑을 비롯해 경상도 아리랑과 독도아리랑을 부른다. 한바탕 흥겹게 편곡된 아리랑도 맛볼 수 있다. 곽동현과 슈퍼밴드는 김산의 옥중아리랑과 새아리랑을 들려주며, 부산'광주 영어방송 풍물패 10명으로 구성된 아리랑밴드는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을 연주한다. 정은하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은 "영남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아리랑 종을 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지난해 연말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무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이를 더욱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으며, 그 방안으로 아리랑대축제는 물론이고 뮤지컬과 소리극 등 다양한 장르로 아리랑을 좀 더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053)668-1800.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308120753035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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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Pick 인터뷰 (1):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774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 기미양 객원기자 등록 2020.12.27 11:12 조회수 485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어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를 통해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기미양-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이혜솔-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기-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기-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이-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기-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이-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기- 이번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맏이하면서 소감은? 이-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기-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이-첫소설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기-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앙상블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달라고 했을때, 2월초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이-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기-아라랑코로나에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이-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이혜솔 명창의 국악 입문경위 기-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이-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나서 몽당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셨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을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비단을 받아서 이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고생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집에서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기-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서 들어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자라면서 노래를 무대에서 불러본적이 있나요? 이-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기-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이-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 노래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기-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이-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기-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이-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기-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이-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기-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이-"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기-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이-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이-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기-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이-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일년 전에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안중근의사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우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이-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기-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이-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기-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이-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기-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이-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기-앞으로 계획은? 이-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다. 그 50여 종의 곡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한번 들르면 가장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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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칼럼: 다시 읽는 'Song of Ariran (1)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